씨름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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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접 씨름을 즐긴 임금은 누구일까요?

A) 충혜왕입니다.
충혜왕은 1330년 2월, 원나라의 승인을 받고 고려의 왕이 되었다. 이때 충혜왕은 16세였다.
충혜왕은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났고, 씨름을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Q) 조선씨름협회는 언제 창립되었을까요?

A) 1927년 11월 27일 초대회장 김동형
1927년 12월 20일부터 22일까지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고, 정규씨름은 신득윤, 통씨름은 현명호가 우승을 차지함.

Q) 씨름이라는 용어는 언제 처음 기록되었을까?

A) 세종대왕은 왕비인 소헌왕후가 죽자 세종은 그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석 가의 일대기를 글과 그림을 남기는《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였는데, 여기에 ‘실흠’이 등 장합니다. 연도는 1447년입니다.

Q) 씨름을 금지시킨 임금이 있다구 합니다. 맞나요?

A) 맞습니다. 다만 씨름을 금지하기도 하고, 씨름하도록 시키기도 한 임금이 영조입니다.
저잣거리에서 씨름을 하고 치고 때리는 일이 빈번하자 씨름을 금지시키고 엄중히 벌할 것을 명하였으며, 이후 92세 노인에게 씨름을 할 것을 권하며 상이 노인에게 명하여 처용무를 하는處容舞人, 사람들과 함께 각저희角抵戱를 하게 하니, 노 인이 잘했다. 상이 이르기를, “장하다 하시고, 물러나라 명하셨다.” 고 알려졌습니다.

Q) 세종대왕은 씨름을 좋아하셨나요?

A) 맞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종대왕때 씨름기록은 10회로 가장 많이 나옵니다. 씨름을 관람하시기를 즐겼고, 씨름하다 실수로 사람이 죽게 되었을때는 교형에 처하지 않고, 장례비를 물어주도록 하였습니다.

Q) 양반도 씨름을 하였을까요?

A) 그렇습니다. “김홍도는 아비의 상사를 만났을 적에 상자를 범했다는 비난이 있었는데 개전의 정이 전혀 없고, 장사를 지낸 후에는 늘 서울 집에 있으면서 동류들을 불러 모아 오로지 장기와 바둑 두기로 일을 삼았으며 혹 각력으로 겨루기도 하면서 슬픔을 잊고 방자하게 노는 꼴을 보는 자가 침 뱉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선조때 오성과 한음의 이항복은 어려서부터 씨름을 잘하여 도전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Q) 조선시대에 씨름을 잘해 이름을 남긴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맞나요?

A) 세종때 승정원 연리 김이는 역사 안사의와 씨름하여 이겨 이름을 남깁니다. 영조때 장사 조두흥이 나오고, “윤창주는 장사로서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성복이란 자가 가장 잘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 계곡선생집에 이항복은 15세 무렵에 이미 건장하고 씩씩한 면 모를 보이며, 용기를 뽐내기를 좋아하여 각저나 축국 같은 소년의 놀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Q)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 에 기록된 씨름 명칭은 무엇일까요?

A) 각력희(角力戲), 각저희(角抵戲 角觝戲) 입니다.

Q) 이순신장군은 씨름을 하였을까요?

A) 직접 씨름을 하였다는 기록은 없지만, 장수와 병사들에게 씨름을 하게 했다는 난중일기 기록 4곳에 보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기록된 씨름은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잠시나마 전쟁의 시름을 잊고 즐겁게 해주기 위한 이순신 장군의 뜻깊은 배려가 보입니다. 단지, 군사훈련의 목적이 아닌, 장수와 병사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려는 의도가 난중일기 내에 잘 드러나있습니다.